초창기 Knoll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한스 놀과 플로렌스 놀은 베르토이아에게 어떤 간섭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어떤 디자인이라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한스와 플로렌스는 단지 그에게 ‘뭔가 흥미로운 것’에 도달하도록 요청할 뿐이었는데, 이후 베르토이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종종 나가서 돌아다녔습니다. 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어떤 멋진 것을 디자인하기 위해서, 나는 마음 속에 있는 의자에 대한 즉각적인 생각을 믿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진도가 매우 느렸지만, 곧 강철 막대나 와이어라는 소재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구부리거나, 똑바로 만들었죠. 스스로 생각하기에, 편안한 집에서 자아를 더 잘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좀 더 합리적인 디자인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 자세나 형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간단하게 자유자재로 형태 구현이 가능한 와이어를 더욱 심도 있게 연구했습니다. 와이어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어떤 공정을 거쳐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어떤 형상이 의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거기에 앉을 수 있는지. 어떤 것은 사이드 체어의 모양이었고, 다른 것은 머리를 받칠 수 있는 모양도 있었습니다. 결국 ‘지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었고, 물리적인 지지력이 확인되고 나면 더 변화를 주기 쉬워졌습니다.
해리 베르토이아는 완벽하고 재능을 타고난 아티스트였습니다. Knoll의 사학자인 브라이언 러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르토이아의 그림은 그의 조각품보다 더 멋집니다. 그리고 그의 조각품은 그가 디자인한 가구보다 더 멋지죠. 그리고 그의 가구는 정말 환상적입니다.”
임즈와 베르토이아 사이에서 일했던 헐버트 매터의 제안으로, 플로렌스와 한스는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면서 베르토이아의 금속 작업실을 동부에 있는 Knoll의 생산 공장 근처로 옮기도록 제안했습니다. 과거 플로렌스는 크랜브룩에서 베르토이아와 수학하는 동안 그에게 좋은 연구 공간과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면 뭔가 대단한 작품이 탄생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베르토이아가 하나의 가구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동안 Knoll 고유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에어로 사리넨과 MIT의 예배당 리모델링 작업을 같이 했으며, 그 이후 남은 그의 25년 삶 동안 빛과 소리, 양감을 그의 그림과 건축 작업물에 불어 넣었습니다.
오늘날 Knoll은 해리 베르토이아의 혁신적이고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유산을 그가 디자인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그의 실험작이었지만 양산되지 못하고 있던 Asymmetric Lounge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